제 17장 민주화 도와주기
나는 밖이 보이는 미군 폭격기 기수(機首) 뒷자리에 앉아서 아래 전개되는 한반도 남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952년 11월, 중국인 첩자 두 명을 만주에 침투시키고 나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가 본 서울은 폐허였다. 1950년 6월 북한군의 공격을 받은 이후 남아 있는 건물은 몇 안 되었다. 북한군과 중공군을 서울 북방 38선까지 밀어내기는 했지만 남한은 여전히 군인들과 군사 장비로 가득 찬 야전지대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동안 하늘에서 보니 나무가 잘려나가고 마을이 파괴된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나라는 북한이 한반도에 입힌 전흔(戰痕)으로 만신창이가 된 전쟁터였다.
그로부터 34년 만에 나는 아내와 함께 전화(戰禍)를 딛고 일어선 한국 땅을 밟았다. 서울은 1953년 휴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현대식 대도시의 모든 시설을 갖춘 인구 1천만의 수도로 변했다. 이 나라는 그 동안 기록적인 경제성장으로 아시아의 한 마리 ‘작은 호랑이’가 되었다. 1986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2퍼센트로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게다가 서울이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게 됨으로써 이 나라는 모자에 또 다른 깃털을 단 셈이다.
나는 미국이 한국을 도와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으켜 세웠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웠다. 한국은 냉전의 일선에서 이룩한 성공 사례였다. 특히 북쪽의 고립된 공산주의 형제와 비교해보면 이 성공은 더욱 눈부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여전히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첫째는 빈틈없이 무장하고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북한의 위협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전선(戰線)은 수도 서울에서 일고 있는 긴장이었다.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임기는 얼마 남지 않았다. 군 장성 출신인 전은 1979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여 그의 전임자들처럼 권위주의 통치를 강행했다. 야당 지도자를 투옥하거나 연금시켰고, 언론을 통제하며 반정부 시위를 진압해버렸다. 호전적인 북한을 핑계대어 자신의 철권통치를 정당화하려던 점도 전임자들과 같았다. 한마디로 병든 풍토였다. 당시 전두환의 권위주의는 미국에 부담이 되고 있었다.
1986년 11월 내가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했을 당시, 한국 정부의 강경책은 폭력시위로 정부에 반대해왔던 대학생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높아진 생활수준에 걸맞은 정치적 선택을 원하는 중산층의 성장과 함께 도전을 받고 있었다. 나는 타이완에서 그 나라가 보다 개방된 사회로 갈 수 있는 기초를 놓는 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던 행운이 한국에서도 따라와주기를 바랐다. 만일 미국이 한국의 민주화를 격려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개방적인 경제와 정치제도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보다 생생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이 나라가 준비하고 있던 1988년 9월의 올림픽 잔치가 자칫 권위주의 지도자의 과잉반응으로 또는 북의 도발로 망쳐지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스러웠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의 개혁을 고무하는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한 정책대립이 한참이었다. 의회와 국무부 쪽에서는 한국이라는 방정식에서 민주주의를 우선해야 한다고 원색적인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동남아에서 공산 침투와 외부 공격으로부터 정부가 붕괴하는 사례를 직접 목격했던 나는 호전적인 북한과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군사분계선으로 분단된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안보도 동등하게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면밀한 감시를 요하는 존재였다. 그 동안 150마일 DMZ 분계선을 따라 야비한 사건을 무수히 도발해온 오랜 역사가 있다. 북한의 여러 가지 테러활동 중에는 1983년 10월 버마에 잠입한 북한 공작원들이 국립묘지의 한 영묘(靈廟)에 폭탄장치를 한 사건이 있었다. 버마의 가장 신성한 묘역에서 일어난 이 폭탄테러는 그 나라를 공식방문중인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을 살해할 목적이었으나, 그 대신 17명의 한국 각료와 대통령 보좌관들, 그리고 버마인 네 명이 희생되었다. 대통령 차량이 예정시간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전두환은 목숨을 건졌다. 버마 경찰은 곧바로 북한 공작원들의 소행임을 밝혀냈다. 그들 중 한 명이 이 테러공격을 실행하기 위해 평양에서 추진한 면밀한 계획을 다 털어놓았다.
나는 한국에서 앞으로 3년간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할 때 미국이 한국의 국방을 돕는다는 공약에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억지(抑止)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동맹국을 굳게 지킨다는 강한 메시지를 평양에 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건 행정부의 안팎에는 내 견해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원청문회에서 메사추세츠 주 존 케리 상원의원은 내게 다그쳤다.
“대사는 무엇이 우선이라고 보는가? 안보인가 민주주의인가?”
나는 답변했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정착되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먼저 북쪽 안보지대를 튼튼히 하고, 한국을 지원하는 문제를 분명히 해야만 한다.”
내 주장을 국내에 설득하기 위해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 전두환을 초청한 일을 성공적인 한국 정책의 한 예로 들었다. 레이건은 한국을 지원한다는 분명한 신호로서 전두환을 워싱턴에 오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대통령의 백악관 초청은 한국 정부가 전두환의 정적(政敵) 김대중의 사형선고를 감형하여 해외로 망명을 허가해야 한다는 조건부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김대중(金大中)은 훗날 한국의 대통령을 선출될 수 있었다.
여기서 내가 받은 교훈은 미국이 정책을 현명하게 조정하면 민주화를 유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상원 외교위원회에 보낸 진술서에서 나는 한국에서 미국의 사명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장 흥미롭고 절실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서울 포스트는 나로서는 최초의 공식 대사직이었다. 국무부 선서식에는 내 생애를 통해 만났던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다. 모인 사람들 가운데 바버라 부시 여사와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부장관도 보였다. 또 가족들과 CIA 옛 동료 예일 동창들도 있었다. 중국 칭다오에서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고락을 같이 해온 엘리너 누님도 남편 빌과 같이 메사추세츠에서 일부러 와주었다. 물론 아내도 있었다. 드디어 워싱턴의 여러 사람들 앞에서 아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여러 나라에서 근무하면서 기쁨과 멋진 삶을 누리고 또 문화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나의 아내 샐리 덕분입니다.”
내 생애를 통해, 그리고 한국 대사로 나가는 자리에서 다시 떠오르는 두 사람을 언급하고 그들이 나라를 위해 봉사한 데 대한 존경의 말로서 인사를 끝냈다. 샐리의 아버지 월러 부스는 한국전쟁 초기 북한에서 작전에 참가했으며 9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큰형님 프랭크는 40년 전에 죽었지만 나의 도덕적 양심을 일깨워주었다고 회상했다.
마지막으로 이미 작고하여 이 자리에 없지만 나라를 위해 봉사하신 두 분을 생각합니다. 나의 장인 월리 부스는 한국전쟁 때 적지에서 싸웠기 때문에 내가 한국의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형님 프랭크는 이 자리에 있어야만 했고 있었을 테지만 아마 계속 나와 함께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방정식에서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입장 때문에 나는 한반도의 분단과 3만7천 명의 주한미군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학생들의 표적이 되었다. 서울에 부임하기도 전부터 나의 허수아비가 화형을 당했다. 일찍이 받아본 일이 없었던 영광이었다. 그런데 서울의 반미감정은 경제문제에도 번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울의 경제개발 전략은 한국에는 플러스였지만 동시에 미국과의 엄청난 무역 불균형을 초래했다. 미국에서는 목축업자, 조선업자, 금융업자, 보험업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들이 한국 기업이 미국에서 누리는 것과 같은 자유를 한국에서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강대국이 약소국을 등쳐먹는 것으로 보였다.
피지배와 관련된 한국인의 선입견은 역사적으로 한 1,000년 전부터 심어져온 것이어서 만일 한국을 아무도 관계하지 않고 혼자 내버려두면 신성한 전통을 누리며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한국인에게 주입시켜놓았다. 그런데 1986년 한국의 젊은이들을 분노하게 하고 상당한 수의 기성세대들도 비판적인 이슈로 등장한 것이 바로 1980년 5월 광부 반정부시위에 대한 전두환 대통령의 무자비한 진압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광주를 기억하자!”는 외침은 보다 민주적인 나라를 원하는 모든 세대의 한국인에게 하나의 시금석이 되어 갔다.
1979년 12월 쿠데타를 주모했을 당시 군 계급밖에 다른 공식직함이 없었던 전두환 장군은 광주진압 직전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학생운동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투옥되었다. 국회가 해산되고 언론은 검열을 받았다. 학생시위 배후에 숨은 손 북한으로부터 침공에 대비한다는 구실 아래 전 장군은 사실상 군이 나라를 장악하도록 만들었다.
5월 17일 밤, 광주에서는 이 지역 출신 지도자인 김대중 체포와 전국계엄령 선포가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를 촉발했다. 도심을 검거한 시위학생과 상당 기간 대치하던 한국군 특전부대는 5월 27일 공격에 들어갔다. 공식적으로는 사망자가 240명 내외로 집계되었으나 비공식 추산은 2천 명에 달했다.
광주 문제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 사이에 미국이 학살에 대해 부분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적어도 한국군의 행동을 묵인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 있다. 광주학살 이후 수년 동안 미국 정부가 사건에 대한 깊이 있는 해명을 꺼렸던 점도 많은 한국인이 미국의 죄과를 믿게끔 부채질했다.
주한 미국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광주의 역사를 잘 알게 되었고 한미관계에 드리운 그림자를 일소해버리려고 노력해 보았다.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는 어떤 위기상황이 주어졌을 때 주한미군과 미 대사관 사이에 미국과 한국에게 중대한 문제에 관한 미국 입장이 모호하게 보일 여지가 있는 어떤 다른 의견도 나와선 안 된다는 점이다. 둘째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어디까지나 한국인 스스로가 자기 나라의 갈 길을 결정해야 하는 ‘한국의 일’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역할은 지원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면 자문해주는 것이지 진행과정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어디까지나 자세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특히 한국인들의 의식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서울 거리를 거니노라면 길목마다 지키고 서 있는 데모진압경찰들의 음울한 모습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신문에는 연일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있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과 같이 복잡한 상황에 대처하려면 정교하게 다듬어진 정책을 가지고 조심스러운 외교적 접근이 필요했다.
나는 확실하게 밀어줄 이슈는 밀어주되, 그렇지 않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을 하는 식으로 대처해나갔다. 그러나 워싱턴에서는 국무부 아태(亞太) 담당 차관보로 자리를 옮긴 가스턴 시거가 보다 노골적인 메시지를 한국 정부에 전하고 있었다. 시거는 1986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필리핀에서 쫓아버리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던 민주화 개혁의 알려진 주창자였다. 이제는 워싱턴에서 1987년 한국 민주화를 지원하는 미국 정부 요인이 되었다. 훗날 가스턴은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당시 한국 민주화 지원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거는 겉으로 드러내놓지는 않았지만 단호한 의지로 민주화 개혁에 동의하도록 전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인물과 타이밍에 대한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발휘했다. 루이지애나출신으로 남부 사람 특유의 느긋함과 비상한 유머감각이 도움이 되었다. 1987년 2월 6일, 뉴욕 아시아소사이어티 연설에서 시거는 한국의 새로운 정치제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발표했다. 특히 민주적인 대통령 직선제를 지지한다고 밝힌 것이다. 동시에 군이 지배하는 한국 정치의 ‘문민화(文民化)’를 강조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연설이 한국의 기존 정치세력과 군부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전 대통령은 1988년 임기가 끝나면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의지를 공언해왔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권력 연장을 꾀하려는 조짐이 보였다. 일부 국민의 불만에 맞서서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돌았다. 시거가 말한 ‘문민화’는 결국 한국 군부의 부당한 영향력을 정치로부터 추방하겠다는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1987년 4월, 전 대통령이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까지 개헌을 고려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자 우리의 움직임과 발표는 보다 긴박하게 돌아갔다. 전 대통령의 결심은 결국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선거인단을 통해 자기 뜻대로 다음 대통령을 뽑겠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되면 심각한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의 야당과 일부 미국 정치인들은 전 대통령의 계획이 충성스러운 후계자를 세우고 자기는 막후에서 권력행사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전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면서 정치 기상도가 급속히 달아올랐다.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시거의 방한이 잦아졌다. 올 때마다 그는 미국 망명에서 1985년 자진 귀국한 이래 동교동에 연금된 김대중을 만나고 갔다. 한번은 시거가 김씨 집에 접근했을 때 그가 탄 자동차를 보안요원들이 심하게 흔들어서 거의 전복될 뻔했다. 조악한 형태의 공포전술이었다.
1987년 격동의 몇 달 동안 나는 야당 지도자들이나 시위 학생들과도 만났지만 김대중을 만나러 가는 시거의 동행 요청은 거절했다. 대사로서 현 정부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없다고 설명해주었다. 한국 정부는 김대중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과격한 학생시위의 배후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되도록 조용히 업무에 임했다. 미국이 한국의 현 정권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공개된 선거, 언론의 자유, 그리고 진정한 야당의 존재를 갖춘 민주화를 지지한다는 미국의 뜻을 이해해달라고 역설했다. 미국 대사로서 주재국 정부와 척을 지는 것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7년 초 집권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 참석하는 문제는 미국 대사로서는 아마 문제가 될 수 있는 행동의 하나였다. 우리 대사관 내에서조차 참석을 반대했고, 나와 상의도 없이 불참한다고 언론에 보도 자료를 내보냈다. 대사관 정무과의 주장은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4성 장군 출신으로 전 대통령의 지명후계자로서 선거인단 선거를 통해 정권을 연장하려는 사람인데, 만일 내가 참석한다면 잘못된 과정을 통해 등장하는 새로운 권위주의 통치자를 축복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대사관 정무참사관은 그래서 불참함으로써 그런 비민주적 절차를 반대하는 뜻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결국 그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 뿐이라고 나는 맞섰다. 내 생각에 노태우(盧泰愚)는 우리가 이럴 때 지원해주면 우리 말을 들어줄 사람 같았다.
전당대회에 내가 나타나니까 미국 대사가 안 올 줄 알았던 몇몇 미디어에서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실제로 서울에 주재한 대사가 60명이나 불참했었다. 대회는 전적으로 연출된 행사였다. 미식축구시합의 응원석을 연상케 했다. 치어리더들이 선창하면 팬들이 군중환호로 화답하는 식이었다. 대회가 끝나자 노 후보는 내게 다가와 내가 어려운 참석을 결심해준 줄 잘 알고 진정으로 고마워했다.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된 6월 10일, 서울에서 전례 없는 대규모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부정한 선거방법을 그대로 두고 노 후보를 밀어붙인 전 대통령의 결정은 결국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서울 중심가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바라본 시청 앞 광장의 시위군중은 20만 내지 30만은 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시위대는 경찰과 거리에서 충돌했다.
시위군중은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가정주부, 상인, 학교 선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여 한국의 중산층 대부분이 궐기하거나 동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국의 시위는 미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당시 화제가 되었던 이란-콘트라 스캔들 보도를 능가했다. 미국 텔레비전에 비친 서울은 마치 전쟁터처럼 보였다.
대사관에 앉아 위기의 전개를 주시하면서 나는 갈등을 증폭시키는 미디어의 역할에 역증이 났다. 미국 뉴스들은 자극적인 얘기를 요구하는 독자들의 센세이셔널리즘에 다분히 영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7년 6월 28일, 아들 제프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의 실제 상황은 미국 신문에 난 것과는 다르다. 서울 시내의 90퍼센트는 데모가 없는 조용한 거리지. 어떤 날 보니까 경찰이 햇볕 아래에서 쉬는 동안 데모학생들도 30야드 떨어진 잔디밭에 누워 담배를 피우며 자기들끼리 잡담하더구나. 그러다가 텔레비전 카메라맨이 오니까 금방 일어나서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니까 경찰들도 같이 맞서는 거야. 이게 오늘 저녁 뉴스 톱이 되는 거지.”
미디어 보도가 필요 이상 과장되긴 했지만 한국의 당면 문제들은 심각하고 고민스러운 수준에 와 있었다. 권위주의 정권이 몰락해가면서 권력을 지탱해나가려니까 온 나라가 힘들었던 것이다.
1986년 10월, 워싱턴에서 가진 주한 대사 취임식에서 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시아에서 얻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1987년의 한국은 바야흐로 권위주의의 길을 계속 가느냐, 아니면 민주주의 사회로 방향을 바꾸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나는 워싱턴에서 보낸 현지 대사로서 한국이 전쟁의 참화를 다시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필요를 느꼈다. 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북한과 중국의 공산 정권들과 대조되는 민주사회를 수립하는 일을 도와주어서 장차 중국과 북한도 그처럼 변화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노력해왔다. 그것은 프랭크 형처럼 높은 이상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이 지지하는 미국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타나는 사태는 이상주의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였다. 우리는 현장에서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치밀하게 계산된 외교전략과 본능적인 용기로 대처해나갔다.
6월 10일 밤, 격렬한 시위 끝에 쫓긴 소수의 학생들이 서울 중심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1890년대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이 대성당은 한국에서 가장 신성한 피난처로 유명했다. 성당에 들어감으로써 학생들은 한국 그리스도교계가 대체로 그들의 요구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다음날부터 시민들이 성당을 점거한 학생들에게 옷과 음식과 돈을 들고 몰려왔다.
그러나 정부로서는 성당 점거가 곤혹스러운 도전이었다. 정부 고위층에서는 학생들을 강제로라도 내몰자는 주장이 있었다. 저돌적인 특수부대원과 반항하는 학생들의 충돌은 성당을 피로 물들이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떠올랐다. 그 처참한 그림이 텔레비전 화면을 타고 전 세계로 퍼지는 날, 그 결과는 정부는 물론 이 나라 전체의 파멸을 불러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월 13일, 최광수(崔侊洙) 외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분연히 말했다. “성당에 군대를 넣지 마세요. 전 세계가 떠들썩하게 됩니다.” 나중에 정부 고위인사에게 들은 얘기지만, 이때 내 어필이 먹혀서 사태를 완화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냉정한 대책이 압도하여 교착상태는 사제들의 중재로 평화스럽게 해결되었다. 성당 주변 이웃들은 실제로 시끄럽고 불손하며 또 단정하지 못한 데모 학생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6일 후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반정부 데모는 전국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때까지 나는 전 대통령이 타협할 줄 모르는, 자기 방식에만 매달리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광주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군에게 데모를 막으라고 명령해도 모든 군인이 다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들렸다.
한국군에는 7년 전 광주진압을 담당했던 장성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끔직한 유혈진압을 원치 않는다고 보았다. 대표적으로 광주진압 특전부대 사령관이던 정호용(鄭鎬溶) 장군은 민간소요에 군을 사용하는 문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한국군끼리 내란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16개월을 앞두고 있는 올림픽의 운명도 좌우될 수 있었다.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테러주의 북한이 남한의 내란에 편승하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6월 17일 수요일, 나는 오래 미루어온 지방 미국문화원 순시 중에 서울 대사관에서 걸려온 정무참사관 해리 던롭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레이건 대통령이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가 오늘 밤 도착한다는 보고였다. 던롭은 내가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청와대에 면담 신청을 해놓겠다고 했다. 일정을 단축하고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친서는 전 대통령이 군을 동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한미 양국 간의 조정된 전략의 하나였다. 한국의 김경원(金瓊元) 주미 대사는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정상적인 외교 루트인 외무부를 통하지 말고 주한 미국 대사가 직접 전 대통령에게 전달하라고 국무부에 자문해주었다. 김 대사의 자문은 청와대에서 오래 일해 온 그의 경륜에서 나온 지혜였다. 당시 우리는 서로 잘 몰랐다. 그와 직접 얘기한 일도 없었다. 단지 그 나름대로 내가 친서를 들고 가서 친서 내용을 뒷받침하는 몇 마디를 거들면 전 대통령이 무력을 동원하려는 생각을 버리도록 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서울에 돌아와 보니 던롭은 아직 청와대의 면담 약속을 받아내지 못했다. 수요일 저녁까지 다음날 오후 내가 청와대로 예방하고 싶다는 메시지에 대한 청와대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6월 18일 목요일, 던롭이 외무부에 알아보니 전 대통령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침내 외무부 관리가 대사관으로 던롭을 찾아왔다. 이 관리는 정중하게 발뺌을 했고, 던롭은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대통령이 귀국의 대통령에게 우리 대사를 시켜 직접 전달하려는 친서입니다. 더구나 전달하는 자리에서 구두로 부연설명을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관리는 말했다.
“잘 압니다만, 우리 대통령이 대사를 안 만나실 수도 있지요.”
던롭은 의전을 따져서 더욱 목청을 높였지만 그 관리는 막무가내였다. 전 대통령이 무력을 사용하기로 이미 결심했기 때문에 안 만나려는가 하는 생각에 그만 의기소침해지기까지 했다. 어느 한국 관리는 그에게 친서를 우편으로 부치거나 청와대 대문에 밀어넣어보라는 말까지 했다.
“전 대통령이 볼 것 아닙니까?”
그 관리의 말이었다.
목요일 오후 나는 전 대통령을 만날 생각을 하면서 서울로 돌아오고 있었다. 대사관에는 정무과 직원들이 항상 라디오를 켜놓고 시위에 대한 뉴스를 청취했다. 사무실에는 가스마스크도 비치되어 있었다. 정무과 직원들은 바쁘게 들락날락했다. 던롭은 냉정을 잃고 전화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전 대통령이 (미국 대사를 안 만나겠다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귀국 대통령이 그랬다는 말을 접수하지 않겠습니다. 그분이 그럴 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실 수 없어요. 빌어먹을, 누가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사람 이름을 대요, 당장!”
내가 대사관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한 시간 늦었다. 던롭이 소리를 지른 효과가 나타났다. 전화벨이 울렸는데 최광수 외무장관이었다. 오늘은 안 되고 다음날 6월 19일 금요일에 내가 전 대통령과 만날 수 있다는 전화였다. 격렬한 시위는 밤새 계속되었다. 서울에서는 군인 한 명이 죽었다. 부산에서는 경찰청장이 치안을 위해 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경찰들은 모두 지쳐서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사관에서는 전 대통령이 계엄령 선포를 결정했다는 예감이 맞아 들어간 것으로 느껴졌다. 금요일 10시 전 대통령은 국방장관, 3군 참모총장, 안기부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토요일 오전 4시를 기해 캠퍼스와 여러 도시에 전투태세를 갖춘 군을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 야당 정치인의 구속과 군사재판 개정까지 계획에 들어가 있었다. 이한기(李漢基) 총리는 이 나라가 급속히 ‘사회혼란’으로 빠져들어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6월 19일 오후 2시, 나는 단독으로 청와대를 찾아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에 앞서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 월리엄 J. 리브시 장군도 참석한 오찬행사를 가졌다. 그가 오는 줄은 몰랐으나 만난 김에 그에게 오후에 전 대통령을 예방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광주의 교훈을 마음에 그리며 리브시와 내가 공동전선을 펴면 한국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하는 사태를 잘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점심을 마치고 호텔을 나오면서 리브시에게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 대통령에게 전달하면서 시위를 진압하는 데 군을 동원하지 말라고 강조하겠다고 설명해주었다. 리브시는 듣기만 했다. 나는 그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다. 이제는 전두환에게 가서 미국은 대통령부터 서울에 와 있는 가장 높은 장군과 외교관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정책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아직도 사태가 우리와 어긋나는 방향으로 틀어져버릴 여지가 충분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우리 전략이 결코 무모하다고 보지 않았다. 시거와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한국 정부에게 민주주의와 타협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도해왔다.
전 대통령은 90분 면담 내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최광수 외무장관과 통역자 한 사람만 배석했다. 전에 만났을 때 그는 활기에 넘쳤고, 자주 독백처럼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웃으며 대화를 독점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날 오후에는 깊은 고뇌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친서를 내주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친서를 읽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편지는 우정 어린 표정으로 씌어졌다. 모두에 전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안보 공약을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한국 대통령의 평화적 정권 교체 공약에 대한 격찬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나라의 계속된 정치발전을 위해 정치범을 석방하고 권력을 남용한 정치탄압 관리를 처벌하며 자유언론을 신장하라고 권했다. 그와 같은 조치들은 “당신이 정확하게 지적한 바 있는 ‘구(舊) 정치’로부터 탈피하려는 당신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극적인 신호가 될 것”이라고 레이건은 썼다.
이어서 내가 나섰다. 계엄령 선포에 대한 미국 입장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레이건 대통령의 우정 어린 친서 내용을 보충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그에게 각인시켰다. 첫째로 내가 주한 미군도 대표해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주한 미군 사령관과 나는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건의하기로 했다”고 전 대통령에게 말했다. 만일 총리가 계엄령 선포가 임박했다고 발표한다면 한미동맹을 저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1980년 광주에서와 같은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고까지 강하게 나갔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최 장관은 오늘 면담으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내 생각에 그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직원들은 대사관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청와대에 가서 내가 한 말을 다시 정리하고 면담에 대한 내 관찰을 덧붙여서 긴 전문을 국무부에 보냈다. 그날 오후 늦게 최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나와 면담 후에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대사관에서 비서로 일하던 한국계 미국이 여직원은 그 소식을 듣고 복도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고맙습니다. 그 일을 막아주어서 고마워요.”
이 여자는 아마 해리 던롭도 끌어안았으리라. 친서를 전달하게 하기 위해 나보다도 더 한국 관리에게 강하게 어필하면서 얼마나 애를 썼던가? 던롭은 후에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외교관 생활에서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만한 일을 했다면 바로 그날 전화로 화를 낸 일이라고.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우리가 한 일에 만족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한국인들 스스로가, 특히 묘하게도 군 고위층이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무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6월 19일까지 긴장된 며칠 동안 전 대통령의 귀에 진언을 넣어주었다. 한편 주요 외교정책 자문관들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다. 우연하게도 타이밍이 잘 맞았다. 워싱턴의 김경원 대사가 레이건의 친서가 가고 있다는 전문을 보내는 동안 나는 지방 여행을 하면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던롭이 면담 약속을 위해 애를 썼다. 청와대로 가던 날 우연히 리브시를 만나 공동전선을 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엄령 선포가 초읽기에 들어간 순간 내가 전 대통령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리브시는 그의 침묵을 내가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인 점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 다음날 어느 대사관 직원에게 내가 자기 동의 없이 행동한 데 대해 대놓고 불평을 하더라는 것. 사실 리브시와 잠깐 의견을 나눈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고 내가 그에게 말한 것도, 공동전선을 대표했다고 한 것도, 즉흥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다. 마치 워싱턴의 김 대사가 내가 직접 전 대통령에게 친서를 들고 가야 한다고 아이디어를 제의한 것처럼. 그러나 일단 6월 19일의 결정이 발효되고 있다고 보이자, 리브시 장군은 미군이 한국군의 서울 진입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다음 주가 시작되면서 잇단 회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이 역사적 전환점에 섰다고 본 시거 차관보는 내 건의에 따라 일정을 바꾸어 싱가포르에서 서울로 날아왔다. 서울에서 보낸 우리의 보고가 워싱턴을 강타했던 것이다. 가스턴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한국에서 보낸) 모든 전문을 다 읽으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엇인가 우리가 해야 하는데……, 결국 우리가 지원하겠다고 말한 것을 지원해보이는 일을 시작했다.”
시거는 방한 중 전두환도 만나고 야당 지도자들도 만났다. 전 대통령과 노태우를 포함하여 대부분 회합에는 나도 동석했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6월 24일, 전 대통령이 김영삼(金泳三)과 처음 만났다. 그러나 전 대통령이 우리를 보고는 야당이 시위를 부추겨 자기 업적에 흠집을 내려 한다고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되면 무력을 동원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의 정권에 대한 반대는 거리시위 형태로 굳어져가고, 전의 선택폭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전은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남은 임기 8개월 동안 계엄령을 선포하여 자신의 업적을 먹칠하고 싶지 않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노태우는 이 나라에 불어온 역사적 대세를 전 대통령보다는 더 의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으로 보였다. 집권당 지도자로서 노는 청와대에 갇혀 있는 전보다 정치사고의 변화에 더 민감한 것 같았다. 노의 보좌관이 우리 대사관 직원에게 한 얘기로는 노태우 자신이 한국 역사에서 ‘지금이 아주 중요한 시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노는 전두환이 지명한 후계자로서 그의 정치적 입지가 현 대통령의 신세를 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이 무렵 노를 애타게 했다. 6월 25일 어느 사석에서 보니까 그가 전의 비호에서 너무 멀리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내게 이런 고백을 했다.
“내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어려운 시기에 아주 어려운 자리에 있음을 압니다.”
나중에 그의 보좌관에게 들은 얘기에 의하면, 그 해 6월 불확실한 나날을 보내면서 너무 걱정이 많고 두려워서 그날 밤 나와 만났던 사석에서 미국 대사관에 피신하는 가능성까지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부인했다. 나는 워싱턴에 노태우가 흔들리고 있다는 전문을 보냈다. 이 긴장된 시기에 미국의 존재는 한국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과시한다고 나는 믿었다.
6월 29일 민정당 본부, 의례적인 출입기자 모임에서 사진촬영이 끝나고 헤어지려는 기자들을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잠시 더 남아달라고 붙들었다. 그 방에 있던 기자들과 생중계된 텔레비전을 보던 시청자들은 노 후보의 극적인 개혁안 발표에 모두 깜짝 놀랐다.
“저는 지금 우리나라 장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6·29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하여 김대중을 포함한 모든 정치범 석방 등 야당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어느 미국 외교관의 표현을 빌리면 “일찍이 본 일이 없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7월 1일,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형식으로 발표된 노태우의 개혁 프로그램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6·29 선언이 누구의 작품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주장하는 사람이 1987년 6월 당시 어느 캠프에 속했었는지 그 입장에 따라 의견이 갈렸다.
훗날 부패와 광주학살의 책임자로 재판에서 실형을 받는 바람에 전과 노 두 사람이 다 불명예를 안게 된 이후 그 지지자들은 대부분 저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6·29선언만은 아직도 그들의 공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6월 29일에 발표된 민주주의 메시지의 주창자는 노태우였으며, 전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뒤따라간 것 같았다.
한국 정치의 새 시대를 선도하는 방법의 하나로, 나는 미국 대사관저에서 열리는 7월 4일 독립기념일 리셉션에 이 나라여야 정치지도자들을 모두 초청하기로 했다. 집권당 후보 노태우와 야당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을 함께 불렀다. 사실 7월 4일이야말로 대통령을 공개선거로 뽑고 군이 문민의 지휘 하에 있으며 3권이 분립된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는 나라 미국의 국경일인 것이다.
김대중을 리셉션에 초청하기 전에 나는 이 정치인의 이력을 조사해보았다. 한국 정부는 이 사람이 공산주의자로서 북한을 위한 간첩활동을 한 선동가라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이것이 그가 실형을 받고 연금된 근거였다. 국무부에 보관된 이 반체제 정치인에 대한 비밀보고서와 경찰조사서까지 모두 요청해서 읽어보았다. 젊었을 때 좌익 정치인이었고 그 후 반정부 활동에 가담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의 주장처럼 무장반란을 선동한 증거도 없었다.
그래서 서울의 후텁지근한 7월 4일 오후, 미국 대사관저에서 재즈밴드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김대중이 마당에 들어섰다. 손님들은 마시던 잔을 놓고 목을 길게 빼어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지팡이를 짚은 김대중은 긴 계단을 절뚝거리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야당을 고압적으로 다루어온 이 나라에서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가 자신이 반대해온 세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원로 군 장성 오자복(吳滋福)과 악수를 했다. 나일강 원류를 찾아갔던 스탠리와 리빙스턴의 만남과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그날 대사관저에서는 한국 역사상 가장 자유롭게 치러진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될 세 사람의 주요 후보가 모두 참석했다. 두 야당 후보 김영삼과 김대중은 개인적인 이유로 단일후보 정강정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집권당 후보 노태우가 과반수가 아닌 36퍼센트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만일 두 김씨가 단일후보에 합의했다면 아마 절대다수로 당선되었을 것이다. 물론 노태우의 6·29 선언이 득표를 도왔고 KAL기 폭파사건도 당선에 영향을 미쳤다.
Lilley, James R., Lilley, Jeffrey, China Hands: Nine Decades of Adventure, Espionage, and Diplomacy in Asia, New York: PublicAffairs, 2004
(김준길 역, 『아시아 비망록: 美국무부, CIA의 기밀해제된 작전 파일』, 서울: 월간조선사, 2005, pp.381-404)
나는 밖이 보이는 미군 폭격기 기수(機首) 뒷자리에 앉아서 아래 전개되는 한반도 남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952년 11월, 중국인 첩자 두 명을 만주에 침투시키고 나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가 본 서울은 폐허였다. 1950년 6월 북한군의 공격을 받은 이후 남아 있는 건물은 몇 안 되었다. 북한군과 중공군을 서울 북방 38선까지 밀어내기는 했지만 남한은 여전히 군인들과 군사 장비로 가득 찬 야전지대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동안 하늘에서 보니 나무가 잘려나가고 마을이 파괴된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나라는 북한이 한반도에 입힌 전흔(戰痕)으로 만신창이가 된 전쟁터였다.
그로부터 34년 만에 나는 아내와 함께 전화(戰禍)를 딛고 일어선 한국 땅을 밟았다. 서울은 1953년 휴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현대식 대도시의 모든 시설을 갖춘 인구 1천만의 수도로 변했다. 이 나라는 그 동안 기록적인 경제성장으로 아시아의 한 마리 ‘작은 호랑이’가 되었다. 1986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2퍼센트로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게다가 서울이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게 됨으로써 이 나라는 모자에 또 다른 깃털을 단 셈이다.
나는 미국이 한국을 도와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으켜 세웠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웠다. 한국은 냉전의 일선에서 이룩한 성공 사례였다. 특히 북쪽의 고립된 공산주의 형제와 비교해보면 이 성공은 더욱 눈부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여전히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첫째는 빈틈없이 무장하고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북한의 위협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전선(戰線)은 수도 서울에서 일고 있는 긴장이었다.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임기는 얼마 남지 않았다. 군 장성 출신인 전은 1979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여 그의 전임자들처럼 권위주의 통치를 강행했다. 야당 지도자를 투옥하거나 연금시켰고, 언론을 통제하며 반정부 시위를 진압해버렸다. 호전적인 북한을 핑계대어 자신의 철권통치를 정당화하려던 점도 전임자들과 같았다. 한마디로 병든 풍토였다. 당시 전두환의 권위주의는 미국에 부담이 되고 있었다.
1986년 11월 내가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했을 당시, 한국 정부의 강경책은 폭력시위로 정부에 반대해왔던 대학생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높아진 생활수준에 걸맞은 정치적 선택을 원하는 중산층의 성장과 함께 도전을 받고 있었다. 나는 타이완에서 그 나라가 보다 개방된 사회로 갈 수 있는 기초를 놓는 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던 행운이 한국에서도 따라와주기를 바랐다. 만일 미국이 한국의 민주화를 격려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개방적인 경제와 정치제도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보다 생생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이 나라가 준비하고 있던 1988년 9월의 올림픽 잔치가 자칫 권위주의 지도자의 과잉반응으로 또는 북의 도발로 망쳐지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스러웠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의 개혁을 고무하는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한 정책대립이 한참이었다. 의회와 국무부 쪽에서는 한국이라는 방정식에서 민주주의를 우선해야 한다고 원색적인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동남아에서 공산 침투와 외부 공격으로부터 정부가 붕괴하는 사례를 직접 목격했던 나는 호전적인 북한과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군사분계선으로 분단된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안보도 동등하게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면밀한 감시를 요하는 존재였다. 그 동안 150마일 DMZ 분계선을 따라 야비한 사건을 무수히 도발해온 오랜 역사가 있다. 북한의 여러 가지 테러활동 중에는 1983년 10월 버마에 잠입한 북한 공작원들이 국립묘지의 한 영묘(靈廟)에 폭탄장치를 한 사건이 있었다. 버마의 가장 신성한 묘역에서 일어난 이 폭탄테러는 그 나라를 공식방문중인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을 살해할 목적이었으나, 그 대신 17명의 한국 각료와 대통령 보좌관들, 그리고 버마인 네 명이 희생되었다. 대통령 차량이 예정시간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전두환은 목숨을 건졌다. 버마 경찰은 곧바로 북한 공작원들의 소행임을 밝혀냈다. 그들 중 한 명이 이 테러공격을 실행하기 위해 평양에서 추진한 면밀한 계획을 다 털어놓았다.
나는 한국에서 앞으로 3년간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할 때 미국이 한국의 국방을 돕는다는 공약에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억지(抑止)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동맹국을 굳게 지킨다는 강한 메시지를 평양에 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건 행정부의 안팎에는 내 견해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원청문회에서 메사추세츠 주 존 케리 상원의원은 내게 다그쳤다.
“대사는 무엇이 우선이라고 보는가? 안보인가 민주주의인가?”
나는 답변했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정착되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먼저 북쪽 안보지대를 튼튼히 하고, 한국을 지원하는 문제를 분명히 해야만 한다.”
내 주장을 국내에 설득하기 위해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 전두환을 초청한 일을 성공적인 한국 정책의 한 예로 들었다. 레이건은 한국을 지원한다는 분명한 신호로서 전두환을 워싱턴에 오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대통령의 백악관 초청은 한국 정부가 전두환의 정적(政敵) 김대중의 사형선고를 감형하여 해외로 망명을 허가해야 한다는 조건부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김대중(金大中)은 훗날 한국의 대통령을 선출될 수 있었다.
여기서 내가 받은 교훈은 미국이 정책을 현명하게 조정하면 민주화를 유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상원 외교위원회에 보낸 진술서에서 나는 한국에서 미국의 사명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장 흥미롭고 절실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서울 포스트는 나로서는 최초의 공식 대사직이었다. 국무부 선서식에는 내 생애를 통해 만났던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다. 모인 사람들 가운데 바버라 부시 여사와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부장관도 보였다. 또 가족들과 CIA 옛 동료 예일 동창들도 있었다. 중국 칭다오에서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고락을 같이 해온 엘리너 누님도 남편 빌과 같이 메사추세츠에서 일부러 와주었다. 물론 아내도 있었다. 드디어 워싱턴의 여러 사람들 앞에서 아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여러 나라에서 근무하면서 기쁨과 멋진 삶을 누리고 또 문화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나의 아내 샐리 덕분입니다.”
내 생애를 통해, 그리고 한국 대사로 나가는 자리에서 다시 떠오르는 두 사람을 언급하고 그들이 나라를 위해 봉사한 데 대한 존경의 말로서 인사를 끝냈다. 샐리의 아버지 월러 부스는 한국전쟁 초기 북한에서 작전에 참가했으며 9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큰형님 프랭크는 40년 전에 죽었지만 나의 도덕적 양심을 일깨워주었다고 회상했다.
마지막으로 이미 작고하여 이 자리에 없지만 나라를 위해 봉사하신 두 분을 생각합니다. 나의 장인 월리 부스는 한국전쟁 때 적지에서 싸웠기 때문에 내가 한국의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형님 프랭크는 이 자리에 있어야만 했고 있었을 테지만 아마 계속 나와 함께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방정식에서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입장 때문에 나는 한반도의 분단과 3만7천 명의 주한미군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학생들의 표적이 되었다. 서울에 부임하기도 전부터 나의 허수아비가 화형을 당했다. 일찍이 받아본 일이 없었던 영광이었다. 그런데 서울의 반미감정은 경제문제에도 번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울의 경제개발 전략은 한국에는 플러스였지만 동시에 미국과의 엄청난 무역 불균형을 초래했다. 미국에서는 목축업자, 조선업자, 금융업자, 보험업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들이 한국 기업이 미국에서 누리는 것과 같은 자유를 한국에서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강대국이 약소국을 등쳐먹는 것으로 보였다.
피지배와 관련된 한국인의 선입견은 역사적으로 한 1,000년 전부터 심어져온 것이어서 만일 한국을 아무도 관계하지 않고 혼자 내버려두면 신성한 전통을 누리며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한국인에게 주입시켜놓았다. 그런데 1986년 한국의 젊은이들을 분노하게 하고 상당한 수의 기성세대들도 비판적인 이슈로 등장한 것이 바로 1980년 5월 광부 반정부시위에 대한 전두환 대통령의 무자비한 진압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광주를 기억하자!”는 외침은 보다 민주적인 나라를 원하는 모든 세대의 한국인에게 하나의 시금석이 되어 갔다.
1979년 12월 쿠데타를 주모했을 당시 군 계급밖에 다른 공식직함이 없었던 전두환 장군은 광주진압 직전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학생운동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투옥되었다. 국회가 해산되고 언론은 검열을 받았다. 학생시위 배후에 숨은 손 북한으로부터 침공에 대비한다는 구실 아래 전 장군은 사실상 군이 나라를 장악하도록 만들었다.
5월 17일 밤, 광주에서는 이 지역 출신 지도자인 김대중 체포와 전국계엄령 선포가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를 촉발했다. 도심을 검거한 시위학생과 상당 기간 대치하던 한국군 특전부대는 5월 27일 공격에 들어갔다. 공식적으로는 사망자가 240명 내외로 집계되었으나 비공식 추산은 2천 명에 달했다.
광주 문제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 사이에 미국이 학살에 대해 부분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적어도 한국군의 행동을 묵인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 있다. 광주학살 이후 수년 동안 미국 정부가 사건에 대한 깊이 있는 해명을 꺼렸던 점도 많은 한국인이 미국의 죄과를 믿게끔 부채질했다.
주한 미국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광주의 역사를 잘 알게 되었고 한미관계에 드리운 그림자를 일소해버리려고 노력해 보았다.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는 어떤 위기상황이 주어졌을 때 주한미군과 미 대사관 사이에 미국과 한국에게 중대한 문제에 관한 미국 입장이 모호하게 보일 여지가 있는 어떤 다른 의견도 나와선 안 된다는 점이다. 둘째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어디까지나 한국인 스스로가 자기 나라의 갈 길을 결정해야 하는 ‘한국의 일’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역할은 지원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면 자문해주는 것이지 진행과정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어디까지나 자세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특히 한국인들의 의식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서울 거리를 거니노라면 길목마다 지키고 서 있는 데모진압경찰들의 음울한 모습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신문에는 연일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있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과 같이 복잡한 상황에 대처하려면 정교하게 다듬어진 정책을 가지고 조심스러운 외교적 접근이 필요했다.
나는 확실하게 밀어줄 이슈는 밀어주되, 그렇지 않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을 하는 식으로 대처해나갔다. 그러나 워싱턴에서는 국무부 아태(亞太) 담당 차관보로 자리를 옮긴 가스턴 시거가 보다 노골적인 메시지를 한국 정부에 전하고 있었다. 시거는 1986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필리핀에서 쫓아버리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던 민주화 개혁의 알려진 주창자였다. 이제는 워싱턴에서 1987년 한국 민주화를 지원하는 미국 정부 요인이 되었다. 훗날 가스턴은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당시 한국 민주화 지원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거는 겉으로 드러내놓지는 않았지만 단호한 의지로 민주화 개혁에 동의하도록 전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인물과 타이밍에 대한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발휘했다. 루이지애나출신으로 남부 사람 특유의 느긋함과 비상한 유머감각이 도움이 되었다. 1987년 2월 6일, 뉴욕 아시아소사이어티 연설에서 시거는 한국의 새로운 정치제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발표했다. 특히 민주적인 대통령 직선제를 지지한다고 밝힌 것이다. 동시에 군이 지배하는 한국 정치의 ‘문민화(文民化)’를 강조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연설이 한국의 기존 정치세력과 군부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전 대통령은 1988년 임기가 끝나면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의지를 공언해왔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권력 연장을 꾀하려는 조짐이 보였다. 일부 국민의 불만에 맞서서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돌았다. 시거가 말한 ‘문민화’는 결국 한국 군부의 부당한 영향력을 정치로부터 추방하겠다는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1987년 4월, 전 대통령이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까지 개헌을 고려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자 우리의 움직임과 발표는 보다 긴박하게 돌아갔다. 전 대통령의 결심은 결국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선거인단을 통해 자기 뜻대로 다음 대통령을 뽑겠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되면 심각한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의 야당과 일부 미국 정치인들은 전 대통령의 계획이 충성스러운 후계자를 세우고 자기는 막후에서 권력행사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전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면서 정치 기상도가 급속히 달아올랐다.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시거의 방한이 잦아졌다. 올 때마다 그는 미국 망명에서 1985년 자진 귀국한 이래 동교동에 연금된 김대중을 만나고 갔다. 한번은 시거가 김씨 집에 접근했을 때 그가 탄 자동차를 보안요원들이 심하게 흔들어서 거의 전복될 뻔했다. 조악한 형태의 공포전술이었다.
1987년 격동의 몇 달 동안 나는 야당 지도자들이나 시위 학생들과도 만났지만 김대중을 만나러 가는 시거의 동행 요청은 거절했다. 대사로서 현 정부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없다고 설명해주었다. 한국 정부는 김대중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과격한 학생시위의 배후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되도록 조용히 업무에 임했다. 미국이 한국의 현 정권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공개된 선거, 언론의 자유, 그리고 진정한 야당의 존재를 갖춘 민주화를 지지한다는 미국의 뜻을 이해해달라고 역설했다. 미국 대사로서 주재국 정부와 척을 지는 것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7년 초 집권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 참석하는 문제는 미국 대사로서는 아마 문제가 될 수 있는 행동의 하나였다. 우리 대사관 내에서조차 참석을 반대했고, 나와 상의도 없이 불참한다고 언론에 보도 자료를 내보냈다. 대사관 정무과의 주장은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4성 장군 출신으로 전 대통령의 지명후계자로서 선거인단 선거를 통해 정권을 연장하려는 사람인데, 만일 내가 참석한다면 잘못된 과정을 통해 등장하는 새로운 권위주의 통치자를 축복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대사관 정무참사관은 그래서 불참함으로써 그런 비민주적 절차를 반대하는 뜻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결국 그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 뿐이라고 나는 맞섰다. 내 생각에 노태우(盧泰愚)는 우리가 이럴 때 지원해주면 우리 말을 들어줄 사람 같았다.
전당대회에 내가 나타나니까 미국 대사가 안 올 줄 알았던 몇몇 미디어에서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실제로 서울에 주재한 대사가 60명이나 불참했었다. 대회는 전적으로 연출된 행사였다. 미식축구시합의 응원석을 연상케 했다. 치어리더들이 선창하면 팬들이 군중환호로 화답하는 식이었다. 대회가 끝나자 노 후보는 내게 다가와 내가 어려운 참석을 결심해준 줄 잘 알고 진정으로 고마워했다.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된 6월 10일, 서울에서 전례 없는 대규모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부정한 선거방법을 그대로 두고 노 후보를 밀어붙인 전 대통령의 결정은 결국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서울 중심가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바라본 시청 앞 광장의 시위군중은 20만 내지 30만은 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시위대는 경찰과 거리에서 충돌했다.
시위군중은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가정주부, 상인, 학교 선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여 한국의 중산층 대부분이 궐기하거나 동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국의 시위는 미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당시 화제가 되었던 이란-콘트라 스캔들 보도를 능가했다. 미국 텔레비전에 비친 서울은 마치 전쟁터처럼 보였다.
대사관에 앉아 위기의 전개를 주시하면서 나는 갈등을 증폭시키는 미디어의 역할에 역증이 났다. 미국 뉴스들은 자극적인 얘기를 요구하는 독자들의 센세이셔널리즘에 다분히 영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7년 6월 28일, 아들 제프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의 실제 상황은 미국 신문에 난 것과는 다르다. 서울 시내의 90퍼센트는 데모가 없는 조용한 거리지. 어떤 날 보니까 경찰이 햇볕 아래에서 쉬는 동안 데모학생들도 30야드 떨어진 잔디밭에 누워 담배를 피우며 자기들끼리 잡담하더구나. 그러다가 텔레비전 카메라맨이 오니까 금방 일어나서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니까 경찰들도 같이 맞서는 거야. 이게 오늘 저녁 뉴스 톱이 되는 거지.”
미디어 보도가 필요 이상 과장되긴 했지만 한국의 당면 문제들은 심각하고 고민스러운 수준에 와 있었다. 권위주의 정권이 몰락해가면서 권력을 지탱해나가려니까 온 나라가 힘들었던 것이다.
1986년 10월, 워싱턴에서 가진 주한 대사 취임식에서 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시아에서 얻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1987년의 한국은 바야흐로 권위주의의 길을 계속 가느냐, 아니면 민주주의 사회로 방향을 바꾸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나는 워싱턴에서 보낸 현지 대사로서 한국이 전쟁의 참화를 다시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필요를 느꼈다. 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북한과 중국의 공산 정권들과 대조되는 민주사회를 수립하는 일을 도와주어서 장차 중국과 북한도 그처럼 변화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노력해왔다. 그것은 프랭크 형처럼 높은 이상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이 지지하는 미국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타나는 사태는 이상주의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였다. 우리는 현장에서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치밀하게 계산된 외교전략과 본능적인 용기로 대처해나갔다.
6월 10일 밤, 격렬한 시위 끝에 쫓긴 소수의 학생들이 서울 중심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1890년대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이 대성당은 한국에서 가장 신성한 피난처로 유명했다. 성당에 들어감으로써 학생들은 한국 그리스도교계가 대체로 그들의 요구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다음날부터 시민들이 성당을 점거한 학생들에게 옷과 음식과 돈을 들고 몰려왔다.
그러나 정부로서는 성당 점거가 곤혹스러운 도전이었다. 정부 고위층에서는 학생들을 강제로라도 내몰자는 주장이 있었다. 저돌적인 특수부대원과 반항하는 학생들의 충돌은 성당을 피로 물들이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떠올랐다. 그 처참한 그림이 텔레비전 화면을 타고 전 세계로 퍼지는 날, 그 결과는 정부는 물론 이 나라 전체의 파멸을 불러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월 13일, 최광수(崔侊洙) 외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분연히 말했다. “성당에 군대를 넣지 마세요. 전 세계가 떠들썩하게 됩니다.” 나중에 정부 고위인사에게 들은 얘기지만, 이때 내 어필이 먹혀서 사태를 완화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냉정한 대책이 압도하여 교착상태는 사제들의 중재로 평화스럽게 해결되었다. 성당 주변 이웃들은 실제로 시끄럽고 불손하며 또 단정하지 못한 데모 학생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6일 후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반정부 데모는 전국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때까지 나는 전 대통령이 타협할 줄 모르는, 자기 방식에만 매달리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광주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군에게 데모를 막으라고 명령해도 모든 군인이 다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들렸다.
한국군에는 7년 전 광주진압을 담당했던 장성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끔직한 유혈진압을 원치 않는다고 보았다. 대표적으로 광주진압 특전부대 사령관이던 정호용(鄭鎬溶) 장군은 민간소요에 군을 사용하는 문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한국군끼리 내란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16개월을 앞두고 있는 올림픽의 운명도 좌우될 수 있었다.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테러주의 북한이 남한의 내란에 편승하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6월 17일 수요일, 나는 오래 미루어온 지방 미국문화원 순시 중에 서울 대사관에서 걸려온 정무참사관 해리 던롭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레이건 대통령이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가 오늘 밤 도착한다는 보고였다. 던롭은 내가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청와대에 면담 신청을 해놓겠다고 했다. 일정을 단축하고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친서는 전 대통령이 군을 동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한미 양국 간의 조정된 전략의 하나였다. 한국의 김경원(金瓊元) 주미 대사는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정상적인 외교 루트인 외무부를 통하지 말고 주한 미국 대사가 직접 전 대통령에게 전달하라고 국무부에 자문해주었다. 김 대사의 자문은 청와대에서 오래 일해 온 그의 경륜에서 나온 지혜였다. 당시 우리는 서로 잘 몰랐다. 그와 직접 얘기한 일도 없었다. 단지 그 나름대로 내가 친서를 들고 가서 친서 내용을 뒷받침하는 몇 마디를 거들면 전 대통령이 무력을 동원하려는 생각을 버리도록 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서울에 돌아와 보니 던롭은 아직 청와대의 면담 약속을 받아내지 못했다. 수요일 저녁까지 다음날 오후 내가 청와대로 예방하고 싶다는 메시지에 대한 청와대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6월 18일 목요일, 던롭이 외무부에 알아보니 전 대통령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침내 외무부 관리가 대사관으로 던롭을 찾아왔다. 이 관리는 정중하게 발뺌을 했고, 던롭은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대통령이 귀국의 대통령에게 우리 대사를 시켜 직접 전달하려는 친서입니다. 더구나 전달하는 자리에서 구두로 부연설명을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관리는 말했다.
“잘 압니다만, 우리 대통령이 대사를 안 만나실 수도 있지요.”
던롭은 의전을 따져서 더욱 목청을 높였지만 그 관리는 막무가내였다. 전 대통령이 무력을 사용하기로 이미 결심했기 때문에 안 만나려는가 하는 생각에 그만 의기소침해지기까지 했다. 어느 한국 관리는 그에게 친서를 우편으로 부치거나 청와대 대문에 밀어넣어보라는 말까지 했다.
“전 대통령이 볼 것 아닙니까?”
그 관리의 말이었다.
목요일 오후 나는 전 대통령을 만날 생각을 하면서 서울로 돌아오고 있었다. 대사관에는 정무과 직원들이 항상 라디오를 켜놓고 시위에 대한 뉴스를 청취했다. 사무실에는 가스마스크도 비치되어 있었다. 정무과 직원들은 바쁘게 들락날락했다. 던롭은 냉정을 잃고 전화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전 대통령이 (미국 대사를 안 만나겠다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귀국 대통령이 그랬다는 말을 접수하지 않겠습니다. 그분이 그럴 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실 수 없어요. 빌어먹을, 누가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사람 이름을 대요, 당장!”
내가 대사관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한 시간 늦었다. 던롭이 소리를 지른 효과가 나타났다. 전화벨이 울렸는데 최광수 외무장관이었다. 오늘은 안 되고 다음날 6월 19일 금요일에 내가 전 대통령과 만날 수 있다는 전화였다. 격렬한 시위는 밤새 계속되었다. 서울에서는 군인 한 명이 죽었다. 부산에서는 경찰청장이 치안을 위해 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경찰들은 모두 지쳐서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사관에서는 전 대통령이 계엄령 선포를 결정했다는 예감이 맞아 들어간 것으로 느껴졌다. 금요일 10시 전 대통령은 국방장관, 3군 참모총장, 안기부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토요일 오전 4시를 기해 캠퍼스와 여러 도시에 전투태세를 갖춘 군을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 야당 정치인의 구속과 군사재판 개정까지 계획에 들어가 있었다. 이한기(李漢基) 총리는 이 나라가 급속히 ‘사회혼란’으로 빠져들어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6월 19일 오후 2시, 나는 단독으로 청와대를 찾아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에 앞서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 월리엄 J. 리브시 장군도 참석한 오찬행사를 가졌다. 그가 오는 줄은 몰랐으나 만난 김에 그에게 오후에 전 대통령을 예방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광주의 교훈을 마음에 그리며 리브시와 내가 공동전선을 펴면 한국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하는 사태를 잘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점심을 마치고 호텔을 나오면서 리브시에게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 대통령에게 전달하면서 시위를 진압하는 데 군을 동원하지 말라고 강조하겠다고 설명해주었다. 리브시는 듣기만 했다. 나는 그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다. 이제는 전두환에게 가서 미국은 대통령부터 서울에 와 있는 가장 높은 장군과 외교관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정책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아직도 사태가 우리와 어긋나는 방향으로 틀어져버릴 여지가 충분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우리 전략이 결코 무모하다고 보지 않았다. 시거와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한국 정부에게 민주주의와 타협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도해왔다.
전 대통령은 90분 면담 내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최광수 외무장관과 통역자 한 사람만 배석했다. 전에 만났을 때 그는 활기에 넘쳤고, 자주 독백처럼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웃으며 대화를 독점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날 오후에는 깊은 고뇌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친서를 내주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친서를 읽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편지는 우정 어린 표정으로 씌어졌다. 모두에 전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안보 공약을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한국 대통령의 평화적 정권 교체 공약에 대한 격찬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나라의 계속된 정치발전을 위해 정치범을 석방하고 권력을 남용한 정치탄압 관리를 처벌하며 자유언론을 신장하라고 권했다. 그와 같은 조치들은 “당신이 정확하게 지적한 바 있는 ‘구(舊) 정치’로부터 탈피하려는 당신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극적인 신호가 될 것”이라고 레이건은 썼다.
이어서 내가 나섰다. 계엄령 선포에 대한 미국 입장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레이건 대통령의 우정 어린 친서 내용을 보충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그에게 각인시켰다. 첫째로 내가 주한 미군도 대표해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주한 미군 사령관과 나는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건의하기로 했다”고 전 대통령에게 말했다. 만일 총리가 계엄령 선포가 임박했다고 발표한다면 한미동맹을 저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1980년 광주에서와 같은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고까지 강하게 나갔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최 장관은 오늘 면담으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내 생각에 그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직원들은 대사관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청와대에 가서 내가 한 말을 다시 정리하고 면담에 대한 내 관찰을 덧붙여서 긴 전문을 국무부에 보냈다. 그날 오후 늦게 최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나와 면담 후에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대사관에서 비서로 일하던 한국계 미국이 여직원은 그 소식을 듣고 복도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고맙습니다. 그 일을 막아주어서 고마워요.”
이 여자는 아마 해리 던롭도 끌어안았으리라. 친서를 전달하게 하기 위해 나보다도 더 한국 관리에게 강하게 어필하면서 얼마나 애를 썼던가? 던롭은 후에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외교관 생활에서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만한 일을 했다면 바로 그날 전화로 화를 낸 일이라고.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우리가 한 일에 만족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한국인들 스스로가, 특히 묘하게도 군 고위층이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무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6월 19일까지 긴장된 며칠 동안 전 대통령의 귀에 진언을 넣어주었다. 한편 주요 외교정책 자문관들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다. 우연하게도 타이밍이 잘 맞았다. 워싱턴의 김경원 대사가 레이건의 친서가 가고 있다는 전문을 보내는 동안 나는 지방 여행을 하면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던롭이 면담 약속을 위해 애를 썼다. 청와대로 가던 날 우연히 리브시를 만나 공동전선을 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엄령 선포가 초읽기에 들어간 순간 내가 전 대통령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리브시는 그의 침묵을 내가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인 점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 다음날 어느 대사관 직원에게 내가 자기 동의 없이 행동한 데 대해 대놓고 불평을 하더라는 것. 사실 리브시와 잠깐 의견을 나눈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고 내가 그에게 말한 것도, 공동전선을 대표했다고 한 것도, 즉흥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다. 마치 워싱턴의 김 대사가 내가 직접 전 대통령에게 친서를 들고 가야 한다고 아이디어를 제의한 것처럼. 그러나 일단 6월 19일의 결정이 발효되고 있다고 보이자, 리브시 장군은 미군이 한국군의 서울 진입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다음 주가 시작되면서 잇단 회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이 역사적 전환점에 섰다고 본 시거 차관보는 내 건의에 따라 일정을 바꾸어 싱가포르에서 서울로 날아왔다. 서울에서 보낸 우리의 보고가 워싱턴을 강타했던 것이다. 가스턴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한국에서 보낸) 모든 전문을 다 읽으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엇인가 우리가 해야 하는데……, 결국 우리가 지원하겠다고 말한 것을 지원해보이는 일을 시작했다.”
시거는 방한 중 전두환도 만나고 야당 지도자들도 만났다. 전 대통령과 노태우를 포함하여 대부분 회합에는 나도 동석했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6월 24일, 전 대통령이 김영삼(金泳三)과 처음 만났다. 그러나 전 대통령이 우리를 보고는 야당이 시위를 부추겨 자기 업적에 흠집을 내려 한다고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되면 무력을 동원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의 정권에 대한 반대는 거리시위 형태로 굳어져가고, 전의 선택폭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전은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남은 임기 8개월 동안 계엄령을 선포하여 자신의 업적을 먹칠하고 싶지 않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노태우는 이 나라에 불어온 역사적 대세를 전 대통령보다는 더 의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으로 보였다. 집권당 지도자로서 노는 청와대에 갇혀 있는 전보다 정치사고의 변화에 더 민감한 것 같았다. 노의 보좌관이 우리 대사관 직원에게 한 얘기로는 노태우 자신이 한국 역사에서 ‘지금이 아주 중요한 시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노는 전두환이 지명한 후계자로서 그의 정치적 입지가 현 대통령의 신세를 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이 무렵 노를 애타게 했다. 6월 25일 어느 사석에서 보니까 그가 전의 비호에서 너무 멀리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내게 이런 고백을 했다.
“내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어려운 시기에 아주 어려운 자리에 있음을 압니다.”
나중에 그의 보좌관에게 들은 얘기에 의하면, 그 해 6월 불확실한 나날을 보내면서 너무 걱정이 많고 두려워서 그날 밤 나와 만났던 사석에서 미국 대사관에 피신하는 가능성까지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부인했다. 나는 워싱턴에 노태우가 흔들리고 있다는 전문을 보냈다. 이 긴장된 시기에 미국의 존재는 한국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과시한다고 나는 믿었다.
6월 29일 민정당 본부, 의례적인 출입기자 모임에서 사진촬영이 끝나고 헤어지려는 기자들을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잠시 더 남아달라고 붙들었다. 그 방에 있던 기자들과 생중계된 텔레비전을 보던 시청자들은 노 후보의 극적인 개혁안 발표에 모두 깜짝 놀랐다.
“저는 지금 우리나라 장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6·29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하여 김대중을 포함한 모든 정치범 석방 등 야당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어느 미국 외교관의 표현을 빌리면 “일찍이 본 일이 없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7월 1일,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형식으로 발표된 노태우의 개혁 프로그램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6·29 선언이 누구의 작품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주장하는 사람이 1987년 6월 당시 어느 캠프에 속했었는지 그 입장에 따라 의견이 갈렸다.
훗날 부패와 광주학살의 책임자로 재판에서 실형을 받는 바람에 전과 노 두 사람이 다 불명예를 안게 된 이후 그 지지자들은 대부분 저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6·29선언만은 아직도 그들의 공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6월 29일에 발표된 민주주의 메시지의 주창자는 노태우였으며, 전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뒤따라간 것 같았다.
한국 정치의 새 시대를 선도하는 방법의 하나로, 나는 미국 대사관저에서 열리는 7월 4일 독립기념일 리셉션에 이 나라여야 정치지도자들을 모두 초청하기로 했다. 집권당 후보 노태우와 야당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을 함께 불렀다. 사실 7월 4일이야말로 대통령을 공개선거로 뽑고 군이 문민의 지휘 하에 있으며 3권이 분립된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는 나라 미국의 국경일인 것이다.
김대중을 리셉션에 초청하기 전에 나는 이 정치인의 이력을 조사해보았다. 한국 정부는 이 사람이 공산주의자로서 북한을 위한 간첩활동을 한 선동가라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이것이 그가 실형을 받고 연금된 근거였다. 국무부에 보관된 이 반체제 정치인에 대한 비밀보고서와 경찰조사서까지 모두 요청해서 읽어보았다. 젊었을 때 좌익 정치인이었고 그 후 반정부 활동에 가담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의 주장처럼 무장반란을 선동한 증거도 없었다.
그래서 서울의 후텁지근한 7월 4일 오후, 미국 대사관저에서 재즈밴드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김대중이 마당에 들어섰다. 손님들은 마시던 잔을 놓고 목을 길게 빼어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지팡이를 짚은 김대중은 긴 계단을 절뚝거리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야당을 고압적으로 다루어온 이 나라에서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가 자신이 반대해온 세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원로 군 장성 오자복(吳滋福)과 악수를 했다. 나일강 원류를 찾아갔던 스탠리와 리빙스턴의 만남과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그날 대사관저에서는 한국 역사상 가장 자유롭게 치러진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될 세 사람의 주요 후보가 모두 참석했다. 두 야당 후보 김영삼과 김대중은 개인적인 이유로 단일후보 정강정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집권당 후보 노태우가 과반수가 아닌 36퍼센트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만일 두 김씨가 단일후보에 합의했다면 아마 절대다수로 당선되었을 것이다. 물론 노태우의 6·29 선언이 득표를 도왔고 KAL기 폭파사건도 당선에 영향을 미쳤다.
Lilley, James R., Lilley, Jeffrey, China Hands: Nine Decades of Adventure, Espionage, and Diplomacy in Asia, New York: PublicAffairs, 2004
(김준길 역, 『아시아 비망록: 美국무부, CIA의 기밀해제된 작전 파일』, 서울: 월간조선사, 2005, pp.381-404)
전 어제 TV이에서 6월 민주항쟁에 대한 프로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아리를 탈퇴하기 전 동아리 선배들이 말씀하신 6월 항쟁은 민중이 군부를 무릎꿇게 하였다. 라고 말하시는 것이 결론이었죠.
하지만 이 글을 보고 나니 그 당시 군부의 역할과 그 행동 그리고 미국의 막후 조정 등 그 당시 상황을 다시 인식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난 후에 6월 항쟁이후로 찬밥신세가 된 군부를 다른 시선에서도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역시 정부의 고위 관리자들의 회고록을 보게 되면 민중이 생각하고 보는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는 점에서 정말 참신하다는.....
PS. 예전에 클링턴 대통령의 아내인 사람의 회고록을 본 적이 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난 당시 매우 놀라고 분노했다. 설마 그가 바람을 피웠을 줄이야."
이 구절이 왜 인상이 깊었는가 하면 그 당시 이 사람 아주 담담하게 TV에 나왔거든요. 참 세상은 요지경이야...



